목차
- AI 자동화가 만든 24시간 업무 환경
- 상시 대응을 요구받는 인간의 새로운 피로
- AI 시대에 퇴근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준

AI는 쉬지 않는다. 밤에도 데이터를 분석하고, 고객 문의에 답하고, 보고서를 정리하고, 다음 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까지 준비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변화다. 사람이 퇴근한 뒤에도 업무가 멈추지 않고, 주말이나 새벽에도 시스템은 계속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런 자동화가 인간의 노동을 줄여줄 것처럼 보인다. 반복 업무를 AI가 대신 처리하면 사람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남는 시간에는 충분히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실제로 AI는 단순 업무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회사가 24시간 돌아가기 시작하면, 인간도 그 속도에 맞춰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AI가 밤새 처리한 결과를 아침 전에 확인해야 하고, 자동 응답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즉시 사람이 개입해야 하며, 글로벌 고객 대응은 "AI가 있으니 가능하다"는 이유로 더 빠른 응답을 요구받을 수 있다.
결국 AI 자동화는 퇴근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퇴근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업무가 자동으로 진행될수록 사람은 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호출될 준비를 해야 하는 존재가 될 위험이 있다.
1. AI 자동화가 만든 24시간 업무 환경
이런 변화는 이미 해외 노동 현장에서 구체적인 언어로 다뤄지고 있다. 아일랜드의 한 산업안전 컨설팅 업체는 2026년 보고서에서, AI 에이전트가 업무 전반에 스며든 지금을 '일과 삶의 경계가 다공질(porous)해진 시대'라고 표현했다. 사람이 처리해야 할 업무 개수는 줄어들 수 있지만, AI가 자율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검증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사람이 맡게 되면서 오히려 순간순간 요구되는 집중력과 판단의 밀도는 높아졌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를 '보이지 않는 업무 부담(Invisible Load)'이라 불렀다. 겉으로는 할 일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AI가 쏟아내는 요약본과 알림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는 심리적 대기 상태가 새로운 형태의 부담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생산성 도구로 주목받던 생성형 AI가 오히려 번아웃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경영 전문지는 2026년 3월 기사에서, 생성형 AI 도구가 업무를 쉽게 만들어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은 프로젝트를 벌이고,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AI에게 새로운 지시를 입력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자동화가 일을 줄여주기는커녕, 할 수 있는 일의 총량 자체를 늘려버린 셈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흐름은 낯설지 않다. 국내 한 경제지의 노동 칼럼은 퇴근 후 메신저로 업무 지시를 받는 상황을 다루며, 즉시 응답한 직원이 인사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응답하지 않은 직원은 불이익을 걱정하는 현실을 소개했다. AI가 업무 속도를 끌어올릴수록,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뒤처진다는 불안도 함께 커지고 있다.
2. 상시 대응을 요구받는 인간의 새로운 피로
이 '보이지 않는 업무 부담'은 단순한 스트레스로 끝나지 않는다. 디지털 알림이 계속 주의를 쪼개는 상태를 전문가들은 '연속 부분 주의(Continuous Partial Attention)'라 부르는데, 이런 상태가 이어지면 판단력이 떨어지고 사소한 실수가 늘어난다는 지적이 있다. 산업안전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안전 문제로 다룬다. 정신이 포화 상태에 이른 사람은 윤리적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미묘한 신호를 놓치고, 결국 더 큰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직장 생활 초기의 경험이 떠오른다. 밤새 작업을 끝내고 다음 날 아침 곧바로 현장으로 차를 몰고 가던 길이었다. 잠깐 졸았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차 앞으로 전봇대가 쓰러져 있었다.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더 아찔했던 기억이다. 그때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 몸이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AI가 밤새 대신 일해준다고 해도, 그 결과를 아침에 확인하고 다음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자동화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몸과 집중력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시 대응이 당연해질수록, 이 한계를 넘어서라고 요구받는 순간은 오히려 더 조용하고 자주 찾아올 수 있다.
3. AI 시대에 퇴근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준
한국 고용노동부는 2026년 상반기 중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제화하겠다고 밝혔다. 근로시간 외에 메신저나 전화로 업무 지시를 받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다만 강제 규정보다는 기업의 자율적 이행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고, 응급실 당직의 나 시스템 장애 대응팀처럼 성격상 상시 대기가 필요한 직군을 어떻게 예외로 둘지, '부당하거나 불필요한 연락'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할지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법 하나로 깔끔하게 해결되기는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다.
그래서 눈에 띄는 것은 제도보다 시스템 설계 쪽의 시도다. 앞서 소개한 아일랜드 사례에서는 급하지 않은 메시지를 AI가 대기 상태로 모아두었다가 정해진 근무시간에만 전달하는 방식,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비긴급 업무 연락망을 아예 차단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었다. 개인의 의지에 기대는 대신, 구조 자체가 '지금은 응답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접근이다. 나는 이 방식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즉각 응답을 성실함의 증거로 여기는 평가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사람은 스스로 알림을 끄기 어렵다. AI가 24시간 일할 수 있다는 것과 사람이 24시간 대기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이 둘을 분리하는 경계선은 결국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긴급과 비긴급을 가르는 기준을 미리 정해두고, 그 기준을 시스템에 맡기는 것이 개인의 각오보다 훨씬 오래 지속된다.
결론: 쉬어도 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
밤새 작업한 다음 날, 몸은 이미 한계였는데도 나는 '해야 하니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몸이 신호를 보낼 때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뼈저리게 알게 됐다.
AI가 밤새 대신 일해준다는 사실이 사람의 몸과 판단력에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동화가 만든 24시간 업무 환경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더 빠른 AI가 아니라, 사람이 안심하고 알림을 꺼도 되는 시간과 구조다. 퇴근은 기술이 허락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도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경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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